百千江河萬溪流
수많은 강물 만 갈래 시냇물,
同歸大海一味水
바다에 가니 한 물 맛이로다.

森羅萬象各別色
삼라만상 온갖 모습이여,
還鄕元來同根身
고향에 돌아오니 본래 한 뿌리이니.

지리산 서암정사(瑞精舍) 초입에 들어서자 3미터 가량 되는 화강암 두 기둥에 적힌 글귀가 먼저 중생들을 반긴다. 셀 수 없이 많은 강과 하천도 바다로 들어가면 한 맛이듯 삼라만상도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 결국 하나라는 뜻이니 이제부터 화엄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같아서 왠지 몸과 마음이 떨리는 감을 떨쳐버릴 수 없다. ‘일주문'을 지나면 오른쪽 바위에 사천왕상이 새겨져있다. 경주 석굴암 사천왕상을 참고해 조각했다는 사천왕상은 자연바위에 일렬로 새긴 점이 남다르다. 사천왕상을 지나 동굴처럼 만들어진 ‘대방광문'(大方廣門)에 들어갈려는 순간 ‘어서 오라 중생이여 이곳이 네가 편히 쉴 곳이니라(善來衆生 此處安樂)'라며 동자상이 반긴다.

‘비로궁'을 빠져나오면 넓은 화엄의 세계다. 망망무제로 펼쳐진 지리산이 한 눈에 쏙 들어오는 탁 트인 경내를 크고 작은 바위들이 둘러싸고 있다. 어디까지가 자연석이고 어디가 인간의 힘이 닿은 곳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돌들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서있다. 서암정사의 불보살 신장들은 모두 바위에 새겼다. 아미타불을 본존불로 모신 석굴법당인 극락전 안 여덟보살과 십대제자, 십장생 동식물 등 ‘극락세계'가 조각되어있고, 비로전의 비로자나불과 문수 보현보살, 법을 구하는 선재동자도 모두 바위에 새겼다.

신비로움에 넉이 나간 채 경내를 살피다가 키가 크고 검게 그을린 구릿빛 노스님이 주장자에 기대어 책을 보고 있다. 큰 절 격인 벽송사를 중창하고 서암정사를 만든 원응(元應)스님이다. 40여년전 전쟁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던 비극의 땅 지리산을 ‘안양'으로 만든 주인공이다.

원응 스님은 부친이신 배상식(裵常植)때부터 불법과 각별한 인연이 있다 부친이 서울 중앙고보시절 새로 부임한 일본인 교장이 학교를 왜색으로 물들이고 학교의 전통과 모든 것을 장악하려 하자 이에 반발해서 학생들과 동맹수업거부에 들어가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하여 이른바 '불령선인'으로 낙인이 찍히고 일제시대에서는 이후로 모든 출세길이 막히게 된다 우리 나라 학교도 그 시절에는 모두 기초적인 것만을 가르치고 수업해서 별로 배울 것이 없다고 여겨서 일본으로 유학을 하려 했지만 이미 일제에 요주의 인물로 명단이 올라 있는 그에겐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 이후 할 수 없이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고 그마저도 중퇴를 했다(소화4월) 그렇게 될 무렵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징용을 하기 시작했는데 배상식은 일제가 식자들에게는 그런 무차별적 징용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의학도의 길로 가게 된다 그 당시에는 수물과(數物科)라 하여 의학도들이 배우는 과정을 이미 연희 전문시절에 공부한 터라 경기도 의생습소를 쉽게 졸업을 하고 한의사의 길로 가게 되는데 의사도 기술만 터득하여서는 진정한 의사가 될 수 없고 마음을 통달한 의사라야 제대로 환자를 볼 수 있다 하여 절로가서 공부를 더 하게 된다

처음에는 단지 절에 가서 수양을 하고 학문을 더 할 목적으로 갔지만 그 당시에도 지금처럼 기복신앙적인 요소가 많아서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는 것이 진정한 공부임을 깨닫고 의학공부는 뒤로 한 체 당대에 선지식이시든 만공스님으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게 되고 만공스님으로부터 게송을 받았으며, 화두 '萬法歸一 一歸何處'를 받게된다. 그 이후 당대의 선지식이셨던 향곡스님과 석암스님과 많은 교류를 하시고 마음공부에 전념하시게 되며 이 최상승 공부를 자식에게 전념시키려고 애를 쓰신다.

  이때 원응스님은 속가에서 늑막염으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부친께서 절에 가서 휴양삼아 공부하라고 권하시게 된다. 부친을 통해 현대과학을 초월한 깊은 불교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고 시심마(是甚?) 화두를 부친에게서 직접 받게 된다.

부친께서 출가수행자나 다름없이 생활하시면서 많은 선지식들에게 지도받고 참선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선지식들과 교류가 많은 터라 자식을 출가를 자연스럽게 유도하게 되고 이후 석암큰스님과 인연이 닿게된다. 스님의 나이 20세 때의 일이었다

이당시에 선암사에는 향곡스님이 조실로 계시고 석암스님이 감사(총무)를 보고 계셨는데 어느 날 주지스님이 참선공부를 열심히 하는 행자를 육조단경을 통해 간단히 시험을 하다가 감복하여 석암스님께 사실을 알리게 된다. 당대의 선지식이시던 석암스님께서는 행자를 불러서 화두공부를 제대로 하는지를 점검해보게 되니 스님은 '보고, 듣고, 느끼고 하는 근원을 관하는 것'이라고 대답을 올리니 석암스님은 대견스럽게 생각하시고 단번에 이 행자를 선방에 입실을 허락하시게 된다. 이제 막 출가한 행자가 선시직과 같은 선방에서 참선을 한다는 것은 특이한 일어었고 이때부터 시심마 행자로 불리며 참선을 계속하게 된다.

그때가 전쟁이 막 끝난 뒤인 1954년이었다. 분주한 도시인 부산을 떠나서 한가한 곳에서 참선에 매진하시겠다고 정처없이 떠돌며 찾아든 곳이 폐허가 된 벽송사였다. 사찰은 쇄락해질대로 쇄락해졌고 끼니 걱정을 해야 했으며 곳감을 만들어 팔아서 겨우겨우 연명하며 힘들고 고달픈 노동을 하고 밤에는 어김없이 좌선을 통해 화두를 잠시도 놓지 않았지만 사찰에 올 때부터 괴롭히던 ‘늑막염'이 끝내 말썽을 부렸다. 용맹정진 등 몸을 돌보지 않고 공부하다보니 각혈까지 하는 등 몸이 최악의 상태가 되었고 . 대중생활을 더 이상 잇기 힘들어졌지만 스님은 불퇴전의 용맹정진을 하게 된다. 스님이 법랍이 10여년이 되었을 무렵 벽송사 전각을 수리하기 위해서 나무를 베어다가 쓴 일 때문에 스님은 옥살이를 여러 번 하시게 된다. 그 당시에는 정부에서 산림법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하인을 막론하고 가차없이 처벌하던 시절이었다.

이후 힘들고 가시밭을 걷는 것과 같은 수행의 나날을 보내면서 김용사와 해인사에서 성철스님을 모시고 입승을 보며 참선을 계속하였고 해제철이 되면 다시 벽송사에 오셔서 또 다시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였다 . 그렇게 10년이 흐른 뒤 은사스님께 나아갔는데 40여 년전 교통이 지금보다 많이 불편하여 지리산에서 부산까지 나가려면 대중교통으로 하루가 걸리던 때였다. 일년에 두어 차례 은사스님 문안차 부산 나들이를 하였는데 음력 9월 그믐경 은사스님 생신 무렵일 때 조용한 시간 은사스님과 대좌하면 가끔 경륜에 대한 말씀을 자주 나누었다. 스님께서 어느 날 염송책拈頌冊 (禪文) 을 넘기다가 옆에 있는 제자를 보면서 십년을 지리산에 들어가 앉아서 소견이 좀 열렸는가, 하시면서...

[] “여기 大通智勝佛이 十劫을 坐不動하여도 佛法이 不現前 하야 不得成佛道라고 했는데 이 뜻이 무 엇인가.
[답] (잠시 침묵하다가)淡淡 佛境界에 또 다시 佛法이란 그림자를 본다면 헛것이겠지요.
[]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리수 下에서 정각을 이루시고 49년간 說法하신 일은 ?
[답] 참의 눈으로 보면 한 판 꿈노름일 뿐입니다.
[] 자네, 工夫로 이 말을 自信하는가?
[답] 꿈에 속지 않으려고 努力하고 있습니다.
[은사스님] 그 뜻을 잘 지키고 名利의 그림자에 조심하도록 해라.

이튿날 元應(근본에서 이탈하지 말라는 뜻)이란 號를 내리시고 傳法偈와 法脈을 손수 써 주시다.

付                부촉하다
元應丈室      원응장실에게

心性如虛空   마음의 성품이란 허공과 같아서
畢竟無內外   마침내 내외가 없구나
了達如是法   이와같은 법을 요달하면
非僞亦非眞   거짓도 진실도 없느니라.

世尊應化二千五百十八年 甲寅年昔湖門人錫巖爲元應久閒說 
세존응화이천오백십팔년 갑인년석호문인석암이 구한에게 설하다.

원응 큰스님께서는 3대 위업을 이루셨다

그 첫째는 당연히 불조의 혜맥을 이어 부처님의 정법이 온사바세계에 퍼지게 하는 대를 이으셨고
그 두번 째는 화엄경 금니 사경을 완성하신 일이며
그 세번 째는 민족의 영산인 지리산에 석굴법당을 장업하신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30여년 전인 1985년부터 10여년간 〈대방광불화엄경〉 58만7261자를 우선 한 자씩 한지에 옮겨 적는데 5년, 감지(柑紙. 닥종이)를 그 위에 덧대고 곱게 빻은 금가루를 붓끝에 묻혀 이를 다시 적는 금사(金寫)에 5년이 걸린 대불사였다 먹사경으로 사전에 오탈자를 다 정리하신 후 다시 그 원본을 보시고 금니사경을 하셨는데 도중에 실명 위기 등 많은 어려움에 봉착하셨으나 기어이 금니 사경을 다 완성하셨다 가히 국보급 문화재로 지정돠어도 한점 손색이 없는 찬란한 불교 유산이라 하겠다.  이후 이 작품들을 서울 부산 대구 뿐만 아니라 대만 중국 상해 등 해외에서도 극찬리에 전시회를 가지셨고 불법으로 많은 인연을 모이게 하셨으며 향후에는 일본과 호주 등에서도 모든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최상승법문의 집약체인 화엄경 전시회를 가질 예정이다.

스님은 늘 하심을 주장하시는데 곁에서 스님을 한 번이라도 친견하여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게 있다. 바로 하심을 몸소 실천하시는 큰스님이시다. 하심은 언어의 뜻으로 알기는 무엇보다 쉬우나 진정한 하심을 행하기는 지위와 신분이 높으면 높을수록 더 어렵다. 스님을 친견하여 보면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는 진솔한 하심을 뵈올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