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우리 마음의 근본적인 오류는 나와 타인을 구분합니다. 우리는 잘못 된 “나”라는 것에 집착하여 탐심이 일어나고 이와 동시에 “타인”에 대한 생각을 일으켜 성냄의 바탕을 만들게 됩니다. 이러한 이원론은 자발적인 사랑과 자비의 표현을 막게 되고 가능성으로만 남게 합니다. 이러한 결과로 모든 존재들의 행복을 기원하지 않고 자신의 행복만을 바라게 됩니다.

타인의 고통을 없애고자 원하기 보다 자신의 고통만을 제거하고 싶어합니다. 다른 이들의 행복을 함께 기뻐하지 못하고 우리 행복에 대해서만 기뻐하게 됩니다. 모든 존재들을 평등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편애하는 놀이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안의” 관세음보살은 숨겨진 채로 남게 됩니다. 

관세음보살이 마음의 본성이라고 해서 형상으로 화현한 모습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성은 현상을 통해 자신을 표현합니다. 관세음보살은 승의제의 수준에서 존재하면서도 개념의 세계(혹은 假名의 세계)에서도 존재하여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본존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관세음보살은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우리의 사랑과 자비를 불러일으키고 우리 안에 내재한 궁극의 관세음보살을 드러내기 위해 모든 부처님들께서 나투는 형상인 것입니다. 그의 이름조차도 이러한 본성을 나타냅니다. 티벳어로 관세음보살은 다음과 같이 풀이됩니다. 

- ‘쩬'은 눈을 의미하고 
- ‘레'는 지속의 의미를 가지며 
- ‘식'은 보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쩬레식(관세음보살)은 “자비의 눈으로 모든 존재들을 끊임 없이 굽어살피시는 이”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마음이 지닌 자비심의 가능성으로서의 관세음보살과 성스러운 본존의 형상으로 나타난 관세음보살의 관계가 (관세음보살 본존) 수행의 참된 바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첫째, 관세음보살은 모든 부처님들의 가피와 자비의 힘을 체현(體現)하고 전수해 주는 본존입니다. 
- 둘째, 우리의 마음은 사랑과 자비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 셋째,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서로 의지하기(緣起) 때문에 첫 번째 요소(본존)가 두 번째 요소(마음)에 영향을 미쳐 가능성을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가능성 없다면 본존은 그저 외부에 있는 아름답고 청명하지만 우리에게 전혀 영향을 줄 없는 존재로 남아 있게 됩니다. 하지만 본존이 없다면 우리의 가능성도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수행의 관점에서 본 것입니다. 그러나 내부와 외부, 어떠한 이원론도 넘어 있는 궁극의 깨달음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부처님 그 자체인 우리의 마음과 본존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는 것입니다. 

[원전: "Chenrezig, Lord of Love" by Bokar Rinpoche, 번역: 까르마 욘땐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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